산티아고 순례길 16일째가 된 날이었다.
로베르토(Roberto)를 다시 만나 점심을 같이 먹기도 했던 이 날은 'San Pedro de Pria'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머무르게 되었다.
숙소는 초록빛 들판이 넓게 펼쳐진 언덕 위에 있는 아주 낡지만 커다란 집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바닥에 곳곳에 세월의 먼지가 많이 묻어있었지만, 이상하게 아늑한 느낌도 드는 곳이었다.
방에 있는 완전히 닫히지도 않는 조그마한 창문 뒤로는 푸른 들판과 회색 빛 돌 산이 보였다.
기분 좋은 샤워를 마치고 젖은 옷을 빨아 널었다.
숙소 오른편에 있는 그늘 밑 소파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과 함께 같이 걷는 친구들과 함께 여러 수다를 떨었다.
한참을 수다를 떨다가 해가 지는 저녁, 숙소 바로 앞쪽에 있는 오래된 교회로 향했다.
해가 지는 아름다운 노을의 풍경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곳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보니 아! 너무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얼굴 찌푸려지는 눈부심이 아니라 따뜻한 눈부심이었다.
주황색의 햇빛과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멀리 보이는 산과 바다, 부드럽게 부는 바람.
낮의 활기찼던 에너지가 포근한 여운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이런 순간을 위해 힘든 걸음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보다가 해가 거의 다 저물어갈 때쯤 고개를 돌렸는데, 저기 바위에 앉아있는 소피가 보였다.
소피의 뒤로 마지막 빛이 빛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소피의 웃음과 저녁 햇빛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소피에게 말해주었다.
"너의 앞날도 지금 이 햇빛처럼 계속 눈부실 거야"
한국어로 말하지 않아 저 표현 그대로를 전달할 순 없었겠지만 마음은 전달되었던 것 같았다.
진심으로 감동을 받은 소피의 모습이 보였다.
문득, 참 아름다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누군가에게 따뜻한 축복을 해주고 감동을 받는 그런 순간을 맞을 수 있어서.
다음 날이 되었다.
힘차게 걸음을 시작하는데, 소피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 전에 그녀는 개인적인 큰 고민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잘 해소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던 그녀는 그 고민을 하나의 돌에 담았고, 걷다가 적절한 곳에 이 돌을 놓음으로써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지길 바래왔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제 눈부신 햇살의 저녁을 보내고 마음이 정리되어 오늘 아침 그 돌을 언덕 위에서 먼 바다를 향해 힘껏 던졌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소피의 표정에는 홀가분함이 보였다. 동시에 아주 작은 슬픔도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유쾌한 위로를 건네보았다.
"소피, 네가 오스트리아 빈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지 며칠째야?"
소피는 오늘이 117일째라고 했다.
"그럼 116일 동안 넌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걸었었구나. 이젠 어깨가 가벼워졌겠다. 너의 까미노는 오늘부터 시작이야!"
소피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껏 가벼워진 어깨로 또 다른 걸음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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