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고 불리는 대성당을 향해 순례자들이 걸었던 길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길들은 가톨릭의 12 사도 중 하나인 '산티아고' 또는 '야고보'라고 불리는 성인의 유해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안치되었다는 소문에 각지의 순례자들이 유해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2일째였다.
머무르기로 생각했던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에는 한창 철인 3종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마을은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열렬히 응원하는 관광객들을 지나 숙소에 도착했을 때 충격적 이게도 남은 침대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같이 걷던 이탈리아 친구들과 함께 잠자리를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탈리아 친구들은 큰 나무 아래 풀숲에서 잠을 청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나는 그 풀 숲에서 자고 싶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도 벌레가 많아 보였고, 여기저기엔 거미줄까지 늘어져 있었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기에 오직 나만 5.5km 정도를 더 걸어 다음 마을로 향하기로 하였다.
그날은 이미 29km 정도의 길을 걸은 상태로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걸음을 잘못 걸었던 건지 오른쪽 두 번째 발가락 쪽에 물집이 잡히려 하고 있었다.
시간은 저녁 6시가 넘어가던 때였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힘듦과 고통을 이겨내며 걷다보니 '아스키주(Askizu)'라는 조그마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사실 마을이라고 하기엔 집 몇 채 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곳이었다. 마을의 중앙에 있는 작은 광장을 지날 때쯤, 저 멀리 벤치에 앉아있는 어느 할아버지가 보였다.
"올라"
눈이 마주친 나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식당 앞치마를 두르고 앉아있던 그 할아버지는 반갑게 인사해 주며 어디서 왔는지, 순례자인지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순례자이고 전 마을에 숙소가 없어 부득이하게 다음 마을로 걸어가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그는 이 더운 날 힘들겠다며 맥주 한잔하고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오, 지저스!
나는 마침 땀도 너무 흘려 목도 마르고 더웠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이 더위에 시원한 맥주로 목이 따갑게 한잔하고 싶었다.
알겠다고 하며 그를 뒤따라갔다. 뒤따라가며 맥주가 얼마냐고 묻자 그는 걱정 말라고 본인이 사는 거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본인의 이름은 '헤수스'라고 했다.
'헤수스' 스펠링은 Jesus로, 영어식 발음으로 하면 제우스, 기독교식 발음으로는 지저스였다.
무더운 여름 헤수스(Jesus)가 제안한 한잔의 맥주.
갑자기 헤수스(Jesus)란 이름이 마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따라 들어간 바는 장사하는 곳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몇 개 없는 테이블 중에 하나는 잡동사니가 올라가 있었고, 안쪽 큰 테이블에는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동창회, 또는 동네사람들의 모임 같아 보였다.
뜬금없이 동양인 한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가자 그들은 신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으로는 탐색을 마쳤는지, 나에게 어디서 왔는지, 이름이 뭔지, 어디 가는 건지 묻기 시작했다. 그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가며 의자에 앉았다.
곧이어 헤수스(Jesus) 할아버지가 시원한 맥주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맥주를 받자마자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머리가 띵했고 목은 아주 따가웠다.
너무 시원하고 고소했다.
급하게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던 헤수스(Jesus) 할아버지는 한잔 더하지 않겠냐며 또 다른 병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키며 먹을 것은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보셨다. 괜찮다고 손사래 쳤으나 몇 번을 더 물어보시더니 갑자기 옆에 흰 반찬통을 열어 보여주었다.
반찬통 안에 든 건 양파와 함께 초에 절인 '엔초비'였다. 이 엔초비는 빵과 함께 먹는 음식이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하며 갑자기 일어나 접시를 가져오시더니 엔초비를 몇 개 덜어 빵과 함께 주는 것이었다.
처음엔 손사래 쳤으나 사실, 공짜로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거절하던 손이 무색하게 나는 열심히 빵을 손으로 뜯어 엔초비를 올려 먹기 시작했다.
가만히 먹는 걸 보고 있던 헤수스(Jesus) 할아버지는 곧이어 마치 코스요리를 서빙하듯 새우도 몇 마리 가져다주셨다.
낚시하는 시늉을 하며 직접 잡은 거라고 설명해 주시는 그의 표정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음식을 먹는데,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던 테이블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단체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지방의 오래된 노래였다.
공짜로 주는 맥주에 음식까지 먹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순 없다는 생각에 노랫소리에 맞춰 몸을 좌우로 흔들며 호응했다.
같이 노래를 부르던 헤수스(Jesus) 할아버지는 내 모습을 보곤 본인의 옆자리를 손으로 두들기며 이리 와서 앉으라고 말했다.
맥주와 엔쵸비, 새우는 나의 팔과 다리를 들어 의자에 앉게 했다.
의자에 앉아 그들과 함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사실 립싱크였다. 스페인어를 따라 부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노래가 끝나자 아주머니 한분이 나에게 한국 노래를 신청했다. 무슨 노래를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가장 한국적인 노래를 부르기로 결정했다.
'애국가'
'나는 지금, 한국의 홍보대사다'라고 생각하며 힘차게 노래를 시작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1절을 마친 나에게 그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주었고, 목소리가 너무 아름답다고 한곡 더 해달라고 요청했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사랑에 대해 노래하는 발라드라고 소개하며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의 나의 첫 데뷔무대는 허름한 바(Bar)였다.
노래를 끝마치자 또다시 박수가 쏟아졌다.
몇몇 아주머니분들은 또 다른 곡을 요청했으나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분위기로 넘어가게 됐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몇 분 뒤 옆자리의 헤수스(Jesus) 할아버지에게 이제 슬슬 떠나야겠다고 말했다. 헤수스(Jesus) 할아버지는 오래 잡아둬 미안하다며 너무 반가웠다고 웃으며 말해주었다. 모두들 나에게로 와서 만나서 반가웠다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다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들은 흔쾌히 받아들여 나는 두 장의 사진을 찍었다. 각도가 이상해 내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찐빵처럼 나왔음에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까지 그들은 나에게 친절했다.
내가 떠날 때 한분은 시원한 물을 챙겨가라고 말하며 냉장고에서 1.5리터 물 한 병을 공짜로 건네주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그들이 건네준 따뜻한 호의로 배가 불렀다.
헤수스(Jesus) 할아버지는 나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는 웃으면서 포옹을 해주었다.
나는 가볍게 포옹하려 했으나 헤수스(Jesus) 할아버지는 나를 꽉 껴안아주셨다.
따뜻했다.
갑자기 울컥하는 느낌과 함께 눈물이 날 뻔했다.
기억에도 없는 할아버지의 품이 이런 걸까 싶었다.
길 위에는 여전히 태양이 뜨겁게 쏟아졌지만 더 이상 덥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든든해진 나는 다음 마을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순례길 위에서 헤수스(Jesus)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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