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나게 된 친구들 중엔 대단한 스펙을 가진 순례자 친구가 있었다.
후에 같이 걸으며 제일 소중한 친구가 되었던 그 친구와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첫날,
앞선 로베트로 에피소드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무지막지한 경사가 있는 언덕을 넘어야하는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넘어야한다기보단, 언덕을 오르는 길을 선택했다. 언덕을 우회해 갈 수도 있었지만 언덕위에 올랐을 때 내려다 보이는 바다의 모습이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힘듦과 아름다운 풍경을 맞바꾸는 순례자스러운 교환을 좋아한다.
언덕 위 능선을 따라 걸으면서 뒤 따라오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 중에 소피(Sophie)가 있었다.
소피(Sophie)와 나는 서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에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기 시작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은 도저히 눈으로만 담아가기엔 아까웠던 탓이었다.
그렇게 뒤에서 소피(Sophie)를 찍어줬는데 내가 찍어준 사진에 굉장히 기뻐했다.
사진속에는 청량한 하늘, 푸른 바다, 넓게 펼쳐진 초원, 멀리 보이는 사람 사는 마을들, 그리고 길을 걷는 순례자까지 모두 담겨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사진으로는 완벽한 구성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찍어준 사진을 교환한 뒤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져 갔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건 걸은지 약 10일이 되던 날, 아름다운 중세도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산티야나 델 마르(Santillana Del Mar)'는 마을에서였다.
저녁을 먹기 위해 알베르게의 공용공간으로 나갔을 때 저쪽 테이블에 순례자들 몇명이 모여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반가운 소피와 그녀와 같이 걷는 친구들이었다.
웃음소리 가득한 테이블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고, 눈이 마주친 소피(Sophie)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반가운 마음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테이블에 앉아 같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게임을 즐기던 중 순례자들답게 다음날 도착하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소피(Sophie)가 내일 도착하는 마을에 숙소가 없을거라는 중요한 소식을 말해주었다. 미리 숙소 예약을 하지 않았던 나였기에 걱정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런 표정을 보았는지 소피가 고마운 제안을 해줬다. 본인의 그룹이 아파트먼트 하나를 빌렸는데 마침 침대가 남는다고 같이 쓰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이번 순례길의 둘째날 숙소가 없어서 아찔했었던 기억이 머리에 스쳐갔다. 이렇게 소중한 기회가 주어지는데 잡지 않을 수 없었다. 흔쾌히 승낙한 나에게 소피(Sophie)는 잘됐다며 반가운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렇게 훈훈했던 밤이 지나갔다.
다음 날 그들과 같이 걷게 되었는데, 같이 걷는 친구들 모두 너무나도 좋은 친구들이었다.
독일에서 온 '나탈리(Nathalie)', 오스트리아에서 온 '샘(Sam)', 미국에서 온 '샨티(Shanti)', 아일랜드에서 온 '션(Sean)'까지 모두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특히 나탈리(Nathalie)와 샘(Sam)은 나중에도 계속 여행을 같이하게 되는 좋은 친구들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 그룹에 융화되면서 각자 순례길을 걷게 된 이유, 어디서 왔는지 등 순례자라면 의레 물어보는 질문들을 하게 되었는데, 소피(Sophie)의 답변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에서 왔는데, 그녀가 출발한 곳이 스페인이 아니라 본인의 집이 있는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것이었다.
구글맵으로 확인해보니 오스트리아 '빈'에서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약 3600km의 거리였다. 내가 걸어야 하는 1000km의 거리조차도 아득하게 느껴지는데 3600km라니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다양한 루트로 10번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했다는 것이었다. 들어보니 20살때부터 시작해서 매년 1번씩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 완주했고, 30살인 지금은 11번째 순례길이라고 했다.
이번 순례길에서 3600km를 걷는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11번째 순례길이라니...
대단한 스펙의 순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었다.
보통 순례자들의 배낭은 10kg이 넘어가는 것이 기본인데, 그녀의 백팩은 다른 순례자들에 비해 훨씬 많은 거리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가벼워보였다.
나도 짐을 싸봤지만, 한달가량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품들을 챙기다보면 10kg이 넘어가는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심지어 나는 이번이 두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인데도 생각만큼 무게를 많이 줄일 수 없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가방에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 즉 우리의 가방에 없어도 그만인 물건들이 다수 껴있었다는 말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머리를 맞은 듯 했다.
나를 포함한 일반적인 순례자들은 도대체 어떤 것들을 그렇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무게를 늘려왔던 것일까.
불현듯 언젠가 우연히 누군가에게 들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순례자의 배낭의 무게는 그 사람의 불안의 무게 아닐까?'
이 문장을 되뇌이며 내 불안의 무게를 돌아보았다. 16kg... 아무리 세계여행을 위해 넣은 물건들이 많다고해도 굉장히 무거운 배낭이었다.
4년전 떠났던 첫번째 산티아고 순례길 이후 불안을 많이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사이 다시 불안의 무게가 이만큼 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 순례길을 통해, 더 나아가 세계여행을 통해 내가 짊어지고 있는 불안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놓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
이런 생각의 흐름을 거친 뒤 소피(Sophie)를 다시 바라 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그녀의 진짜 대단한 스펙은 3600km의 거리, 11번의 순례길이 아니라 그녀의 가벼운 불안의 무게였다는점을.
소피(Sophie)는 진짜 프로 순례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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